담배를 피우러 나온 사람은 나 뿐만이 아니었다.
"아까 발표 잘 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당황스러워하는 내게 꾸벅 인사를 하며 말했다. 무의식적으로 그 사람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죽 훑어봤는데, 옷 차림새로 보아하니 나보다 어린 듯 했다. 그는 내 시선이 조금 불쾌했는지, 오가사와라 선생님하고 같은 학교에 근무한다며 피워도 되냐고 물었다. 난 별로 그 사람과 말하고 싶지 않아져서 그러시라고 했다. 찰칵 하고 불이 켜졌고 두 개의 연기가 공중을 향해 수직으로 올라갔다.
오가사와라와 같은 학교에 근무한다는 얘기를 듣고도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은 단지 나와 그 사람 사이의 어떤 연결고리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데, 내게 말을 걸 건수를 만들기 위해 오가사와라 얘기를 꺼냈을 그 사람은 나의 덤덤한 태도에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몇 분간 침묵 상태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그 무례한 사람은 이름을 밝혔다. 타케다라고 했다. 굳이 그 사람의 이름까지 들을 필요는 없었고 타케다도 내게 말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는지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소개를 끝내자마자 내게 던지듯 말했다.
"근데 시미즈 씨, 오가사와라 선생님과 그만 만나주셔야겠는데요."
타케다는 내게 미묘한 표정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감지했을까. 심장이 무서운 속도로 뛰고 있었다. 고동 소리가 체외로 들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으니. 내가 뭐야 넌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는 말했다. 선생님은 유부남이시잖아요. 처가에 그런 사실이 알려지고 싶지는 않으시겠죠 - 아니, 사실, 알려져도 상관은 없었다. 아이까지 생긴 이상, 맘이 약해서 아이를 위해서라도 절대 이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이 생활을 겨우겨우 억지로 끌고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타케다가 나와 오가사와라의 사이를 안다는 것에는 놀랐지만, 그가 협박조로 내뱉은 말은 그다지 내게 충격을 주지 않았다. 그런 것으로 협박해서, 내게서 무엇을 얻어내려는 걸까. 나는 그의 말에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상대할 가치도 없었다. 반응은 곧 쓰잘데기 없는 에너지 낭비에 불과했다.
"그 침묵은 지금 긍정하고 계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겁니까?"
그는 'OK목장의 결투'를 찍고 있는 카우보이라도 된 듯한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말려들면 안 된다. 내가 배신한, 내가 사랑하는 오가사와라는 네가 아닌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내가 그의 마음을 지켜 줘야 한다. 설령 내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타케다라고 소개한 그 자에게 말했다. 처가에 알리든 말든 맘대로 하십시오. 난 쿄우스케와 헤어질 생각 전혀 없으니까. 내가 '쿄우스케'라고 한 것이 조금 거슬렸는지, 그 단어를 듣자마자 타케다의 왼쪽 눈썹이 묘하게 꿈틀거렸다. 아마 내 앞의 새파랗게 젊은 녀석은 오가사와라를 한번도 이름으로 불러 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저 자식이 대충 뭘 어떻게 하려고 하는지는 훤히 보인다. 오가사와라에게서 나를 떼어낸 후 그를 가로챌 생각이었나보지. 그리고 녀석을 강제로 꿀꺽하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병신. 네깟 놈한테 쿄우스케를 뺏기지는 않을 테다.
용건이 끝나셨으면 가 주시죠, 하고 살짝 도발하자 그는 잠시 평정을 잃는 듯 했다. 그리고 쿄우스케가 불쌍했다. 그런 완벽한 외모를 타고난 건 그가 희망해서가 절대 아니다. 어쩌다가 그렇게 예쁜 얼굴을 하고 태어나게 되어서는. 마음에도 없는 이상한 새끼들이나 꼬이게 되고 말이다. 내가 아직도 더 할 말이 남았냐는 식으로 쳐다봤더니, 다시 의연한 표정으로 돌아간 그는 결국 입을 열었다 - 오가사와라 씨, 지금 제 침대에서 자고 있습니다.
응?
저 미친 놈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그말은 지금 자기가 쿄우스케를 이미 낼름 집어삼켰다는 얘기인가? 눈에 띄게 얼굴로 드러났을 내 동요를 알아차렸는지 상대는 희미하게 웃었다. 갑자기 독사마냥 섬뜩한 표정을 짓는 상대에게 엄청난 혐오감을 느낀 나는, 차오르는 울분에 그만 상대방의 멱살을 쥐었다. 내가 평정심을 잃어버린 것이 그리도 즐거운지 타케다는 킥킥 작게 웃었다. 내가 거칠게 숨을 씩씩 몰아쉬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나는 타케다의 옷깃을 쥔 손을 놓을 수 있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하고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상대는 실실 쪼개며 대답했다. 물론 오가사와라 선생님의 의지로 이루어진 일은 절대 아니죠.
강간했다는 뜻입니다.
그 말에 자동으로 주먹이 나갔다. 이 개새끼야 하고, 이미 휘청거리는 상대를 연거푸 두들겨 댔다. 화가 났지만, '씨발'이라는 단어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누구를 주먹으로 쳐 본 적은 거의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때리는 족족 잘 들어맞았는지 타케다는 점점 만신창이가 되어 갔다. 입술과 입 안이 터졌는지 입가로 피가 흐르는데도, 상대는 아무런 반격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피하지도 않았다. 갑자기 나만 나쁜 놈이 되는 것 같아서 때리기를 그만 두었다.
이제 좀 시원해요?
상대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분노 게이지가 한가득 상승하는 것을 겨우 눌러 참았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시미즈 선생님이 오가사와라 선생님 곁에 매일 진득하게 붙어계시지 않는 이상, 제가 그런 짓을 다시 저지르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는 것 아닌가요? 이따위 소리를 눈 깜박 안하고 내 앞에서 지껄이는 배짱에 그만 질리고 말았다. 그리고 타케다는 덧붙였다.
오가사와라 선생님은 쫄깃하니까, 맞아가면서라도 맛볼 가치는 충분하죠. 안그래요?
현기증이 일었다.
아마 나는 그 말에 폭주했을 것이고, 피떡이 되어 거의 빈사 상태에 이른 타케다를 내게서 떼어놓은 것은,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미나모토 선생님이었다. 시미즈!! 거의 비명에 가까운 그녀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리자 나는 내 손이 피범벅이라는 것을 알았다. 달려온 미나모토 선생님은 나를 마주하자마자 손을 들어 내 양 뺨을 철썩 철썩 때렸다.
진정해. 네가 이런다고 나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알겠어?!
그제서야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타케다의 입원 수속을 마쳤다. 나는 병원 로비에 멍하니 있었는데, 미나모토 선생님이 오셔서 내 옆에 앉으셨다.
이혼하는 게 어때?
그녀의 말에 나는 퍼뜩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얼른 사고가 이어지지 않아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발언을 곱씹었다. 이혼하라구? 이혼이 뭐지? 난 정신적으로 완벽한 공황상태였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아 나는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울고 있었다. 왜 우는지는 나 스스로도 몰랐다. 그냥 눈물만 연거푸 쏟아낼 뿐이었다.
묘하게 시미즈 당신 컨디션이 좋아 보인다고 느낄 때가 있었어. 그날이 오가사와라 선생을 만나는 날이었던 모양이지? 아내에게는 뭐라고 둘러댔어? 보나마나 외지 출장이라고 했겠지. 틀렸어? - 아니요, 맞습니다. 당신이 모두 맞히고 있어... - 네가 결혼한 여자의 집안이 보통 집안은 아니라는 것 쯤은 알고 있지? 그 정도의 재력이면 이미 네 뒷조사도 끝났을 걸. 네 부인은 너에 대해 잘 모를 수 있지만, 네 장인이라는 작자는 너에 대해 아마 줄줄 꿰고 있을 거다. 니가 무슨 담배를 피우는 지도 알고 있을걸?
그런 점에서 이미 넌 한참 지고 들어가는 거야 이 바보씨야 - 빚을 지고 있어요. 내가 그녀의 말허리를 자르며 공허하게 말하자, 재잘재잘 내 처가에 대해 잘도 떠들어 대던 미나모토 선생님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내 대학 4년 전 학기 비용과 기타 생활비. 전부 그쪽에서 대 줬어요. 기업에서 주는 장학금이라고 속이고는, 나를 판 거에요 우리 부모님은. 그 집 딸하고 결혼시켜 주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나봐요.
그런 걸 담보로 걸었을 정도면 말이죠 - 기업 입장에서, 나 같은 놈이 탐나는 인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명확하게 이해할 수가 없다. 결혼하자마자, 내게 학교를 그만두게 할 줄 알았다. 날 자신들의 집안으로 끌어들이려고 그 여자와 나를 결혼시켰다는 가설이 가장 유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나를 한낱 학교 선생으로 내버려 두었다. 물론 그리 행동한 그들의 판단이 내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맙기까지 하다.
어지간히도 배짱이 없는 내게는, 학생들에게 무시당하며 괴짜 취급 당하는 물리 교사 같은 게 딱 어울리니까.
그가 훌쩍 전근을 가 버린 것과 더불어, 딸이 생긴 것을 알고 나서는 그에 대해 거의 체념할 수 있었다. 억지로 한 행위에서 그런 열매가 맺어져 나올 수 있음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조기 성교육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더군다나, 엄연한 남자인 그를 떠올리며 한 짓에서, 그런 놀라운 결과가 도출된다는 것을 알고 나서 말이다. 아이가 그녀에게서 하루 하루 자라가는 나날이 나에게는 정말로 지옥과도 같았다. 아이가 자랄수록 내가 결혼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가능성은 점점 축소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앞으로는 아마 섹스리스 상태로 살아가야 할 것이었다. 아내는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공연한 오해를 사게 될 것이 뻔했다. 이 결혼 생활이 박살난다면, 내 부모님도 함께 박살나게 될 것이었다. 막상 딸이 태어나고 나서는 내가 딸의 양육에 지대한 관심과 과도한(?) 애정을 보였지만, 아내와 함께 간 산부인과에서 출산 예정일을 받아왔을 땐, 무슨 사형 집행일이라도 받아온 기분이었다.
잔뜩 핼쓱해진 오가사와라와 맞닥뜨린 것은 아이가 태어나고 1년 후였다.
몇 마디를 흘리고 상념에 잠겨버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던 미나모토 선생이 문득 한숨을 쉬었다. 덕분에 맑은 물 밑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있던 의식이 수면으로 떠올랐다. 빚이라. 확실히 큰 액수네. 그녀가 중얼거렸다. 엔화가 아닌 달러화다. 달러화로 빌려준 후 엔화로 받는 것이었으리라. 담보물은 나. 이자는 없음. 하지만 원금 자체의 부피가 상당히 큼...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일을 나와는 한 마디 상의없이 저질러 버린 우리 부모님에게도 실망했지만, 인신 매매단이나 체결할 법한 불공정 계약을 순순히 받아들인 그 기업에도 정말로 실망했다. 더군다나 부채를 갚아야 할 사람이 그 기업에 근무하고 있는 사원인데도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와 결혼한 여자가 불쌍하다. 착하다. 어디 내놓아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예쁘기도 하다. 그런데 왜 나 같은 것과 결혼해서 말이야. 더 좋은 남자, 그러니까 당신을 사랑해줄 남자하고 결혼할 수도 있었잖아. 부모님의 주선으로 결혼 전에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내 가짜 웃음을 진짜인줄 알 정도로 순수했다. 상견례를 할 때쯤 되어서야 그 여자가 어떤 신분의 사람인지를 알 수 있었지만 말이다.
문득, 아내가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쿄우스케를 만나고 오던 날, 아내가 내 와이셔츠를 받아들며 중얼거린 말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 당신은 로션도 안 바르는데, 와이셔츠에서 남성용 화장품 향이 나네.
아무리 네가 원치 않았던 혼사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굴면 안돼. 넌 정말 나쁜 새끼야. 네 부모님 얼굴에 똥칠하는 거밖에 더 돼? 잘 가. 하고 오가사와라가 내 눈앞에서 현관 문을 쾅 닫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 난 정말 나쁜 자식이다. 씨팔, 현모양처를 두고 남자랑 바람이나 피우는 개 호로자식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부모는 자식 팔아먹어도 되고 자식은 부모 얼굴에 똥칠하면 안되나?
비교 항목이 잘못되었다는 것 쯤 나도 안다. 두 비교 대상은 완벽하게 등호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도 거의 같은 수준의 나쁜 짓이잖아. 나를 위해 쓴 돈이라고 해도 그에 대한 대가로 난 지금 이렇게 불행하게 살고 있잖아 씨팔.